외근 중 우연히 마주한 모판의 풍경에 괜히 마음 한켠이 뭉클해졌습니다.
지금은 기계화된 농업이 일상처럼 자리 잡았지만, 그 속에서도 어릴 적 고향에서 경험했던 손모내기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있었습니다.
어릴 적, 고흥 시골 마을에서는 매년 이맘때쯤이면 마을 전체가 들썩였습니다.
모내기철이 되면 이웃집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품앗이로 서로의 논을 도우며 함께 모를 심곤 했죠.
아직 이앙기가 보편화되기 전이어서, 사람 손으로 직접 볏집으로 묶은 모를 한 포기 한 포기 정성스레 심었습니다.
물이 가득한 논에 발을 디디면 한껏 미끄럽고 차가웠지만, 이내 익숙해져 손과 발이 분주히 움직였습니다.
등허리는 아팠지만 함께 웃고 떠들던 마을 사람들의 정겨운 목소리, 김밥과 삶은 계란을 나눠 먹던 점심시간의 정취는 지금도 마음 깊숙이 남아 있습니다.
제가 자랄 무렵부터는 이앙기가 등장해 일손을 덜어주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모판을 키우는 일은 여전히 집집마다의 몫이었습니다.
마당 한켠에 쫙 펼쳐진 모판 위로 물을 뿌리고, 햇빛과 바람을 살피며 정성을 들였죠.
이 모판은 마치 새 생명의 시작점처럼 소중했고, 한 해 농사의 성패를 가늠하게 했습니다.
요즘은 대규모로 농사를 짓는 분들은 직접 이앙 작업을 하시지만, 소규모 농가나 고령 농민들은 농협을 통해 모판을 예약 구매하는 방식으로 많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예전처럼 이웃이 함께 모여 손을 보태던 모습은 보기 힘들어졌지만, 대신 효율성과 시간 절약이라는 또 다른 방식으로 농촌의 삶은 변화하고 있죠.
그러나 이런 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모판이 주는 ‘생명’의 이미지입니다.
한겨울을 지나 움트는 새싹처럼, 모판 위 초록빛은 여전히 생명력과 희망을 상징합니다.
바쁘게 돌아가는 삶 속에서도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 초록을 바라보는 순간, 나는 여전히 자연과 연결되어 있다는 위로를 받게 됩니다.
모내기 풍경은 그저 농사의 일부가 아닌, 삶의 일부였습니다.
논길을 따라 발을 딛던 기억, 허리를 굽히며 모를 심던 손길, 따스한 햇살 아래 땀 흘리며 웃던 얼굴들… 모두가 추억의 퍼즐처럼 오늘의 내 삶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아이들과 함께 고향을 찾아 그 논길을 걸어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야기해주고 싶습니다.
"예전엔 이 논에서 엄마(아빠)가 모내기를 했단다." 고된 농사였지만, 그 속엔 함께 했던 마음과 계절의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었다는 것을요.
지금 이 순간에도 어느 시골 마을에서는 이앙기의 굉음 속에, 누군가는 조용히 추억을 떠올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기계는 바꾸었지만, 사람의 마음은 그리 쉽게 바뀌지 않기에, 우리는 여전히 그 시절을 기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