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우리 시골에는 그때 그시절의 커피잔과 유리컵이 있다.
흔한 커피잔 하나가 감성을 파고드네..
나이드나봐
언제부터였을까. 시골 마을에서도 믹스커피가 일상이 되었다.
빨간 뚜껑의 대용량 커피통과 설탕, 프림이 나란히 놓여 있던 부엌 선반이 떠오른다.
지금은 간편하게 하나씩 포장된 믹스커피를 종이컵에 따라 마시지만, 예전엔 커피도 ‘정성’이었다.
커피 한 스푼, 설탕 반 스푼, 프림 듬뿍 넣고 따뜻한 물을 부어야 비로소 완성되는, 그야말로 손맛 나는 커피였다.
어릴 적 시골 외할머니 댁에 가면, 마을 어르신들이 마루에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며 커피를 나눠 마시던 기억이 있다.
그땐 누가 커피를 샀을까?
요즘처럼 마트가 잘 되어 있던 시절도 아닌데, 아마 읍내 나갔다 온 누군가가 "이거 몸 좀 따뜻해지라고 사왔어" 하며 슬며시 내밀었겠지. 유리병에 담긴 커피가 얼마나 귀했던지, 뚜껑을 열 때마다 퍼지는 그 구수한 향이 마치 보물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커피잔. 지금처럼 종이컵이나 머그잔이 아닌, 꽃무늬가 새겨진 얇은 자기 찻잔이 생각난다.
아주 조심스럽게 잡고 마셔야 했던 그 찻잔은 마치 무언가 특별한 순간을 위한 도구처럼 느껴졌다.
어른들이 커피 마실 때는 항상 조용히 지켜보던 나도, 가끔은 아주 약하게 탄 커피 한 모금을 얻어먹곤 했다.
쓴맛에 찡그리면서도, 어른이 된 것 같아 괜히 으쓱했던 그 시절.
시간이 흐르고, 믹스커피는 이제 어디서나 흔하게 마실 수 있는 음료가 되었다.
시골 버스정류장 앞에도, 마을회관에도, 심지어 논밭 한가운데서도 믹스커피를 타 마시는 풍경이 자연스럽다.
종이컵 하나만 있으면 누구든 쉽게 나눌 수 있고, 따뜻한 한 모금에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런데 가끔은 그 시절 커피잔에 마시던 믹스커피가 그립다.
향이 더 짙었던 것 같고, 맛은 지금보다 더 부드러웠던 듯하다. 사실은 커피 맛보단 그때의 사람들, 공간, 그리고 마음이 담겨 있어서였겠지만.
어느 날 문득, 시골 할머니 댁 장독대 옆 벤치에 앉아 믹스커피 한 잔을 마신다.
종이컵 속 따뜻한 갈색 커피에서 나는 향이 코끝을 간질인다.
그 순간, 어릴 적 들었던 웃음소리와 바람결, 그리고 소박했던 그 시절의 커피잔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지금의 커피는 빠르고 편리하다.
하지만 가끔은 그 느리고 다정했던 옛날의 믹스커피 한 잔이, 마음속에 더 깊이 남는다.
그렇게 커피는 단순한 음료를 넘어, 추억이고 사람이고, 시간의 향기가 된다.